2023년 05월호 Vol.13

[VOL.13] [휴먼 오딧세이] 수묵화의 거장 서정 이승연

라이프스타일 2023-05-31 13:16 이신재
[VOL.13] [휴먼 오딧세이] 수묵화의 거장 서정 이승연
50여년은 족히 흘렀지 싶다. 처음엔 그저 묵이었고 붓이었으나 지금은 묵이 나고 붓이 나다. 한 몸이나 다름없지만 그래도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다. 마음을 다 담았다 싶었는데 돌아보면 뭔가 빠진 것 같아서 그리고 또 그린다.

사랑방 30년

삼송리 고개 넘어 오금마을 옛길 얕으막한 산 밑. 동양화가 이승연의 작업실이다. 이십 수년, 아주 작은 나무 한그루, 야생화, 풀 한 포기에도 그의 손때가 묻어있다.

그림 그리다 어깨가 아프고 몸이 쑤시고 눈이 침침해지면 작업실 주변을 가꾸었다. 텃밭도 매고, 작은 등도 달고 조각품도 배치하고 모양 있는 돌도 여기저기 심었다. 계곡물을 담아 자그마한 연못도 만들었다. 그림을 잘 그리는 손은 만들기 재주도 좋았다.

눈에 보이는 것 모두 그가 만들고 꾸민 것 들이다.

사랑방이 된지는 오래되었다. 지인들이 찾아오기도 하지만 더러는 그가 호스트가 되어 초청한다. 봄이면 새 철이라서, 여름이면 녹음이 좋아서, 가을이면 마음이 울긋불긋 해져서, 겨울이면 매서운 찬바람이 눈발을 날려서.

[VOL.13] [휴먼 오딧세이] 수묵화의 거장 서정 이승연


이유는 없다. 대충 갖다 붙이면 그만이다. 화실인지, 막걸리 주막인지, 국악 한마당인지 굳이 몰라도 된다. 어울려 마음을 나누고 삶을 같이 하는 기분 좋은 난장, 그것이면 충분했다. 평생의 업인 수묵 못지않게 사람을 좋아해서이다.

미술인은 당연하고 언론인, 스포츠인, 연예인, 종교인에 더러는 정치 쪽 사람들도 모여 들었다. 사람은 다 다르고 직업 역시 같지 않았지만 ‘서정네 화실’에 오면 그저 모두 한 색깔의 문화인이었다.

돌아보니 지나 온 세월이 멀다. 스무살이 될까 말까였다. 담양 산골에서 무작정 뛰쳐나왔다. 문방사우에 돈 몇푼이 전부였지만 서울로 가야만 될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랬지 싶지만 그땐 그게 길이라고 생각했다.

변두리의 비 새는 지하 단칸방. 난을 치고 산수화를 그리는 것이 사치였다. 당장 다음 끼니가 없었으니 왜 아니 그랬겠는가. 하지만 먹물 냄새는 언제나 향긋했고 붓을 잡으면 신났다.

나는 행복했고 배 고픈 예술인이어서 더 당당했지만 남 보기에 그의 그림 길은 참으로 어둡고 침침했다. 옛 어른들 말처럼 ‘앉으나 서나 그림만 그리고 있으면 ’떡이 나오나 밥이 생기나‘였다. 하지만 미련퉁이처럼 오직 한 길을 걸었는데도 길이 이어졌다.

붓 터치가 섬세해졌고 먹의 농담이 예술이었다. 매냥 그 자리에 머문 듯 했지만 매일 매일 붓, 먹을 벗 삼았더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림이 대나무처럼 훌쩍 커 있었다.

대한민국 미술대전에 출품했다. 입선을 하고 특선을 했다. MBC미술대전, 대한민국 진경미술대전 등 출품하면 특선이었다. 한국화 화단에 이승연의 존재가 드러났다. 덕분에 대한민국 미술대전을 비롯 전남, 충남, 경기, 전북 미술대전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했고 그가 특히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환경 미술대전엔 심사위원장을 맡았다.

함께 그리고 함께 막걸리를 나누었던 그림 친구들은 어느 새 하나 둘 떠나고 없었다.
[VOL.13] [휴먼 오딧세이] 수묵화의 거장 서정 이승연


동강은 흘러야 한다

환경사랑은 그림쟁이들의 숙명이다. 사람들이 살다보면 개발하지 않을 수 없지만 개발은 필히 파괴를 우선하고 그러다보면 자연은 망가지게 마련이다.

영월 동강댐 건설이 한창 추진되던 때였다. 이유는 있었지만 동강 댐은 어라연을 물속에 잠기게 하고 사행천을 매몰시키는 행위였다. 더욱 안좋은 것은 곳곳에 산재해있는 동굴을 무너뜨려 엄청나게 큰 불행을 부를 수 있었다.

무지한 사람들의 엄청난 추진력으로 동강 댐 건설이 거의 확정되었다. 이승연은 그곳으로 달려가 동강의 아름다운 자연을 화폭에 담아 전시를 하며 댐 건설 반대운동에 앞장섰다.

그의 그림은 경향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렸지만 댐 건설 주장이 힘을 얻고 있어서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다. 조선일보는 사라지는 어라연의 풍광을 아쉬워하면서도 댐 건설을 기정사실화 했다. 그러나 그는 댐 건설을 반대하는 환경주의자들과 함께 ‘동강은 흘러야 한다’고 외쳤다. 되돌릴 수 없는 물길이었지만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환경론자들의 ‘타당한 주장’이 받아 들여졌다.

동강 댐 건설은 백지화되었고 동강은 지금도 굽이굽이 흐르며 수많은 사람들의 레프팅 명소가 되었다.

경향신문과는 그 때 인연이 되어 주간 연재물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의 삽화를 그렸다. 사회의 문명화로 사라져 가는 우리네 옛 추억을 되돌아 보는 시리즈 물로 무려 1년 반 이상 계속되었다.

그는 원두막, 꽃상여, 서리, 쥐불놓이, 허깨비, 몽달귀신 등 어린 시절 회상장면과 장발단속, 통행금지, 기율부, 몸뻬바지와 월남치마 등 사회문제의 한 페이지를 한국화로 그려냈다.

굳이 기사를 읽지 않아도 됐다. 그의 삽화 하나면 충분할 정도로 이승연의 표현력은 뛰어났다. 일찍이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분야로 이승연은 뜻하지 않게 한국 사회 추억 그림의 전문가가 되었다.

[VOL.13] [휴먼 오딧세이] 수묵화의 거장 서정 이승연


그림이 쌓이고 이름이 쌓이고

‘묵색의 예술가’ 이승연을 찾는 곳이 생겼다. 누구나 배우고 싶은 화풍이었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이승연은 어느 새 수묵화에서 일가를 이루고 있었다. 묵색 하나로 산수화, 풍경화, 자연과 사람을 다 표현했다. 묵은 묵이되 그가 만들어 낸 검정은 한 가지가 아니었다. 담묵, 중묵, 농묵이지만 아주 옅은 묵색에서부터 진하디 진한 묵색까지 ‘총천연색’이었다. 그래서 그의 화선지 수묵을 보고 있으면 컬러화를 보는듯하고 한참 후 기억을 끄집어 내보면 영락없는 채색화였다.

동아일보에서 운영하던 동아문화센터에 나가 한국화 강의를 했다. 처음 몇 명에 불과하던 한국화 지망생이 갈수록 늘어났다.

롯데백화점 문화센터, 금천 문화원에서도 강의를 부탁했다.

그 때 그곳과 화실에서 배운 제자들이 나중에 ‘서정회’를 만들었고 한동안 인사동 등지에서 서정 그림전을 열었다. 서정 그림전이었지만 그는 한 두점 찬조 출연만 했고 대부분 서정회 회원들의 작품들이었다.

찾는 곳이 많아지자 덩달아 바빠졌다.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는 그래도 괜찮았지만 한국미술협회 감투는 전혀 원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런데 어쩌다 이리저리 얽히다보니 자리에 앉게 되었다. 한국미술협회 동양화분과위원장, 고양시 문화재단 이사를 지냈다.

지금은 한국미술협회 국제담당 부이사장이다. 이것도 자리이지만 자원했다. 한국화의 위상이 전 같지 않아서였다. 모든 분야가 한류 바람을 타고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지만 한국화는 제자리에서 한 치도 나가지 못했다. 오히려 뒷걸음질이고 쪼그라 들었다.

한때 수천만원을 호가하던 한국화 대가들의 그림이 절반, 아니 그 이하로 절하되었다. 한국화의 세계화를 위해 몸을 바칠 수 있다면 기꺼히 바치고 싶어서 맡았다. 하지만 길은 요원하고 갈수록 위축되고 있어 안타깝다. 오래 걸렸지만 자신의 그림 세계는 틀을 잡았으나 이것만은 참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VOL.13] [휴먼 오딧세이] 수묵화의 거장 서정 이승연


한국화는 한국화, 중국화는 중국화

한국화는 오랫동안 동양화의 틀 속에 갇혀 있었다. 중국 그림의 틈새에 있는 작은 부분처럼 치부되었고 그래서 한국화가 따로 없었다.

중국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다. 비슷한 구도이다 보니 그렇게 느껴졌고 옛날 사람들은 그것을 당연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화와 중국화는 다르다. 중국 그림이 신선을 그리고 있으면 한국화는 보통 사람을 그렸다. 농부가 있고 장터 사람들이 있고 시골 초가 집이 등장한다. 여백의 아름다움도 중국과는 급이 다르다.

중국화는 서양화처럼 꽉 찬 느낌이지만 한국화는 여백의 기운이 그림을 감싸고 있다. 가득 차 있어도 공간이 있고 그 공간에는 자연과 사람의 향기가 있다.

“같은 듯 다르다. 민족이 다르듯 풍취가 다르다. 우리들 그림에는 중국 그림에서 느낄 수 없는 멋과 맛과 비움이 있다. 문화에서 차원을 찾는다는 것이 좀 그렇지만 한국화의 차원은 중국화를 뛰어넘고도 남는다. 우리 회화가 서구 미술에 밀리지 않았으며 좋겠고 젊은 작가들도 국적 불명의 그림보다 우리 것을 그렸으면 좋겠다.”

이승연도 중국의 산수를 그린다. 실경 산수에서 보면 그들의 소재가 남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인화에선 중국풍을 다 없앴다. 같은 매화라도 더 단아하다. 국화는 더 깨끗하고 겨울 눈에는 따뜻함이 있다. 그들에겐 민화나 문인화가 없다.

이승연은 그래서 한국화 화가이다. 동양화 화가가 아니다. 담채도 그려내지만 수묵의 깊이에 더 빠져있다. 대작은 으레 수묵이다. 붓과 먹으로만 그리지만 수십가지의 흑과 백이 빛에 따라, 감정에 따라 화선지위에서 춤 춘다. 밤의 묵색과 아침 묵색, 햇빛 찬란한 한낮의 묵색과 저녁 황혼의 묵색이 서로의 검은 색을 강조하며 함께 따로 어울리고 쪼개지는 것이다.

서정 이승연. 사람들 사이에서 살고 있는 그의 묵과 붓은 50여년 생명력을 가지고 앞으로도 쉼 없이 제 갈 길을 갈거다. 끝 없이. 예술이 그러하듯이...

[VOL.13] [휴먼 오딧세이] 수묵화의 거장 서정 이승연


이승연 작품전

일시/ 6월 14일~27일
장소/ 인사동 가나 인사아트센터 5층

열 다섯 번째 개인전이다. 갤러리 한 쪽 벽면을 가득 채우는 1000x180의 대작이 주를 이루고 있다. 수묵과 수묵담채 25점을 선 보인다.

하늘공원 미술관에서 첫 개인전을 연 날로부터 이십수년이 흘렀다. 인사아트프라자에서 열었던 ‘이승연 유묵필담’전도 벌써 4년 8개월여 전이다.

그룹전과 초대전은 수백차례에 이른다.

1982년 의제 허백련 추모 기념전이 시작이었다. 불교 미술전, 수묵의 정중동전, 정선 아라리제, 환경 이야기전, 대한민국 작가전, 현대한국화 협회전, 베이진 한중 우수작가 작품전, 불일불이전, 한,우즈벡 교류전, 중국심천 수묵지로 초대전, 오사카 한국문화원 초대전, 전남수묵비엔날레전 등 한해도 거르지 않았다.

심사위원, 운영위원으로도 많이 활동했다.

대한민국 미술대전,경기, 충남, 전남, 김포, 김해 미술대전에선 심사위원으로 대한민국 미술대전, 평화 미술대전, 호국 미술대전, 명인 미술대전, 환경미술대전 등에선 운영위원으로 움직였다.

오세권(미술평론가. 대진대학교 교수)은 이승연을 이렇게 정의했다.

‘이승연에게 있어서 수묵은 각품세계를 이루는 정신이며 핵심이다. 예도에 입문 후 학습과정에서 이미 서예와 문인화에 대한 심도있는 학습을 통해 필묵의 기법과 정신을 습득했다. 그리고 지금도 항상 고전을 가까이 하며 자신의 정신을 연마하고 이를 작업으로 드러내기 위한 모색을 멈추지 않고 있다. 이승연이 갖는 자연과 인간에 대한 신뢰와 사랑과 달리 그의 작품 세계는 냉철하고 깊이에 대한 철저함으로 가득하다. 80년대 후반부터는 문인적 취향의 필묵산수를 발표하면서 동시에 문인화 자체를 희화화 시키기 위한 작업을 한동안 보여줬다. 매화를 소재로 해 먹색의 여운과 함께 공간적 깊이를 가지면서 구도의 변화를 주는 작품은 그의 특작으로 손꼽을만 하다.’



[이신재 마니아타임즈 기자/20manc@maniareport.com]
  • sns
  • sns
  • mail
  • print

저작권자 © 월간마니아타임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