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5월호 Vol.13

[VOL.9] [휴먼 오딧세이] 아무나 다 갈수 있지만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간다

베하필하모닉오케스트라 여성 지휘자 김봉미

커버스토리 2023-02-09 11:55 이신재
[VOL.9] [휴먼 오딧세이] 아무나 다 갈수 있지만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간다
그녀의 소리는 가슴으로 들어온다

느낌이다. 촉촉하게 젖어들어 몸을 깨우고 마음을 연다. 감성을 어루만지는 선율, 오감이 반응한다.

“그녀의 음악을 들으면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콩쿨 사상 최초로 여성지휘자를 선정한 ‘2010 헝가리 부다페스트 국제 마에스트로 콩쿨 ‘ 심사위원장도 그녀의 소리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 소리는 참으로 오래 걸렸다. 타고 났음에도 수없이 더하고 빼고 나누면서 보다듬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에겐 완성이라는 것이 없다. 모든 게 과정일 뿐이다.

‘시지프스의 돌 굴리기’.

바위 산 정상을 향해 돌을 굴려 올리지만 꼭대기에 이르면 굴러 떨어지고 그러면 다시 밀어 올리는 영원한 되풀이.

머물러 있지 못하게 한 신의 벌이다. 시지프스는 천형이지만 그는 그 길을 선택했다.

낯선 길도 겁 없이 걸었다. 험한 길도 피하지 않았다. 누구나 다 갈 수 있지만 아무도 가지 않는 그 길, 가야 할 길이고 가고 싶은 길이다.

힘들지만 고통을 즐기는 사람처럼 늘 ‘그 길’에 서서 자신을 까탈스럽게 몰아쳤다.

그래야 마음의 소리로 청중의 가슴 속으로 들어갈 수 있어서다.

[VOL.9] [휴먼 오딧세이] 아무나 다 갈수 있지만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간다


“까다롭게 하고 수없이 갈고 닦아야 비로소 둥글게 됩니다. 둥글어서 부드러운 소리를 내는 일이니 철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만족해도 청중들은 만족하지 않습니다. 만족스럽지 못하니까 하고 또 하게 되는 거죠. 매번 해도 매번 새로운 시작입니다. ”

김봉미, 음악을 타고 난 우리 시대에 가장 핫한 여성 지휘자.

베하필하모닉오케스트라 지휘자며 유나이티드오케스트라 음악감독으로 2003년 동양 여성 최초로 헬무트 릴링 슈트트가르트 바흐 오케스트라 합창단을 지휘했고 2006년 쥐드베스트팔렌 필하모닉 독일 3개도시 순회 연주를 했으며 빌레펠트 오페라극장 오케스트라,독일 빅밴드 오케스트라와 현대 작곡가 콘서트에서 협연하면서 음반도 발매했고 2010년 여성 최초로 ‘2010 헝가리 부다페스트 국제 마에스트로 콩쿨’에서 지휘자 상을 수상했으며 2011년 신진 여성문화인상(문화관광부)을 받았고 2012년 대한민국 오페라 대상 지휘자상을 받으며 차세대를 이끌어갈 리더로 선정(국제신문)되었고 한중수교 20주년 기념 창작 오페라 초연 베이징 초청 공연을 하고 2015년 말레이시아 국왕 초청 공연, 2017년 호치민 메세나 창립공연, 2020년 신사참배를 죽음으로 막아섰던 주기철목사의 오페라 ‘열애’, 2021년 세계 4대 오페라 페스티벌 공연을 한 바로 그 사람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부산대학교, 단국대에서 후진들을 가르치고 2008년 국내 데뷔전을 극찬리에 마친 후 서울필하모닉, 시흥교향악단, 부산시향, 창원시향, 헤럴드필하모닉, 부산시립청소년고향악단, 인제100인오케스트라, 꿈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2022년까지 15년여간 모두 261회의 아름다운 공연을 하고 2017년엔 37회나 포디엄에 서면서 해마다 20회 이상의 공연을 했고 2022년 12월에는 7차례의 공연을 소화한 초인적인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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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김봉미는 음악을 타고 났다.

얼핏 한 번 듣고도 바로 건반을 두드린 천재 소녀였다. 음을 들으면 건반의 자리가 바로 떠올랐다. 아홉살 때 이미 교회의 피아노 주연주자였다. 작곡가이며 지휘자인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그가 원하면 무엇이든 해냈다.

아버지 김성득씨는 어린 딸의 재능을 일찍부터 알아봤다. 건반을 두드린 첫 소리부터 범상치 않았다. 콩쿨에 나가면 바로 대상이었다. 어깨 넘어 건성으로 배운 피아노가 뼈 빠지게 연습한 다른 아이들 보다 나았다.

딸의 천재성을 의심치 않았던 아버지는 바이올린도 시켰고 콩쿨에도 내보냈다. 그냥 친 피아노가 상을 받았으니 제대로 배운 바이올린이면 당연히 대상이라고 생각했다. 가르친 선생이 이제 겨우 몇 개월이라며 안된다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그런데 바이올린은 달랐다. 대상을 받지 못했다. 아버지는 그 길로 바이올린을 접게 했다. 시간이 더 필요했을 뿐이지만 그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딸의 길이 멀고 험한 걸 그만은 알고 있었다.

영원한 우상이었던 ‘사랑주의자’ 아버지는 그러나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가 당연한 듯 음대에 입학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천국으로 가셨다. 갔지만 아버지는 가지 않았다. 머릿속, 가슴 속 깊은 곳에 있었다. 어느 날 문득 지휘자의 길에 들어 선 것도 떠나도 떠나지 않은 아버지의 마음이 그에게 속속들이 녹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학, 시지프스 길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부재. 상실감 때문이었을까.

아버지가 못 이룬 유학의 꿈이 불쑥 뛰쳐나왔다. 아버지는 연좌제 때문에 평생 꽁꽁 묶여 있었다. 우리나라 첫 영화감독이었던 할아버지(김영하)가 6.25전쟁 후 북으로 간 까닭이었다.

후일 납북으로 밝혀졌지만 당시는 그런저런 말을 할 형편이 아니었고 아버지는 이데올로기의 덫에 갇혀 꿈꾸던 길을 갈 수가 없었다.

다섯 살 아래 여동생 찬미가 눈에 밟혔지만 한 번 떠오른 생각을 주저 앉힐 수 없었다. 하긴 여동생은 그때도 이미 자신보다 더 어른스러웠다.

러시아로 향했다. 상트페터스부르크 국립음대에 들어갔다. 힘든 여정이었으나 배우는 기쁨은 그 이상이었다. 하지만 미완성이었다. 갑작스럽게 터진 IMF로 인해 생활비를 감당할 수 없었다.

1년여만에 돌아왔으나 마냥 헛 일은 아니었다. 그의 음악성을 본 러시아의 스승이 훗날 독일 최고의 피아노 스승에게 그를 추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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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후 다시 유학길에 올랐다. 독일 에센 폴크방 국립음대 피아노과에 입학했다. 수석이었으나 수석이랄 것도 없었다. 한국 유학생 10여명과 각국에서 모여 든 많은 학생들 중에 입학을 허락 받은 건 그 한 명 밖에 없었다.

“미친듯이 매달렸죠. 건반만 겨우 달린 '피아노 아닌 피아노'로 연습했습니다. 어느 날 교회 목사님 집에 들렀더니 번듯한 피아노가 있더군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피아노 앞에 앉았습니다. 밥도 먹지 않고 피아노를 치자 목사님과 가족 분들이 이상하게 보더군요. 아차 싶었지만 ‘진짜 피아노의 소리’를 포기 할 수 없었습니다. 그 후에도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피아노를 쳤습니다.”

얼마나 지독하게 쳤든지 팔이 저려왔다. 손가락 두개가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쉬지 않았다. 계속 치다보면 풀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독일의 노스승은 동양의 이 가녀린 여학생을 무척 아꼈다. 입학 할 때부터 수제자로 점 찍었다. 그의 대단한 편애에 다른 학생들이 불만을 털어놓았으나 노스승은 ‘남다른 걸 어찌 하느냐’며 무시했다. 그 스승이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건반을 두드리다 위경련으로 쓰러진 그를 말리고 나섰다. 그제서야 혹사를 멈추었지만 잠시 뿐이었다. 소리가 마음에 조금이라도 들지 않으면 흡족할 때 까지 매달렸다.

불같이 화낸 노스승. 그건 여자가 갈 길이 아니다

졸업도 수석이었다. 이번엔 혼자가 아니었다. 앞에서 배운 여럿이 있었지만 군계일학이었다. 스승은 그녀와의 공연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김봉미의 길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언제부터인지 잘 모르겠지만 가슴 한 켠이 허전했다. 이제는 잊은 줄 알았던 아버지의 모습이 불쑥 불쑥 떠올랐다. 합창단의 수많은 단원들을 한 몸처럼 움직였던 지휘자 아버지였다,

피아노를 슬그머니 놓고 지휘봉을 잡았다.

노스승은 불같이 화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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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가기엔 너무 힘들다고 했다. 피아노는 약속의 땅이지만 여성 지휘자는 유럽에서도 불가능의 영역이라고 했다.

수많은 거장을 배출한 데트몰트 국립음대 지휘과에 들어갔다. 처음이어서 학사 과정부터 다시 시작했다. 길은 조금씩 달랐지만 세 번 째 학사였다. 전액 장학금을 받았고 또 수석으로 졸업했다. 어지간하면 그만 둘 때도 되었지만 내친 김이라며 석사까지 할 건 다 했다.

‘귀하신 몸’이 되었다. 연주를 잘 하는 여성 지휘자는 독일에도 없었다. 동양 여성 처음으로 슈트트가르트 바흐 오케스트라 합창단을 지휘했다. 쥐드트베스트팔렌 필하모닉 독일 3개 도시 순회 연주를 했다. 비엘필더 오페라극장 오케스트라와 드레스덴 유스 오케스트라 객원 지휘자로도 활동했다.

처음엔 여성이어서 세웠으나 한 번 공연 후엔 실용주의적인 독일 그대로 실력을 보고 초청했다. 오래고 오랜 공부가 유럽에서 막 터지는 성공의 세월이었다.

그러나 그는 서둘러 돌아왔다. 불모지 한국 땅에서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싶었고 가족이 그립기도 했다. 서울엔 유학시절 결혼한 남편과 독일에서 낳은 아들이 있었다.

그 아들은 목숨 걸고 지킨 아이였다.

아이는 느닷없이 들어섰다. 공부가 많이 남아 계획을 세우지 않았는데 어느 날 그들을 찾아왔다. 8주쯤 지났을까.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희귀한 편이지만 뇌수종이라고 했다. 낙태가 금지된 독일에서도 낙태가 허락되는 병이라고 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 그런 건가 했다. 주위에선 미련을 가지지 말라고 했으나 그의 모성은 그럴수록 더 치열했다.

아이와 함께 하기로 했지만 고민은 끝이 없었다.

석사 졸업이 얼마 남지 않은 때여서 더욱 정신이 없었다. 한국에 전화를 했더니 좀 더 기다려 봐야 한다고들 했다. 12주는 되어야 정확하게 알 수 있다는 전문가의 소견도 들려주었다.

희망과 절망이 매 순간 오갔다. 어쨌든 함께 하기로 결심 했지만 틈을 비집고 튀어나오는 번민까지 막을 순 없었다. 엄마로서 그렇지 않으리라는 믿음은 있었고 그렇다한들 잘 키울 자신도 있었지만 공부에 이르면 망연자실이었다.

어떻게 그 시간들이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의사는 허허 웃으며 누가 그런 진단을 했느냐고 했다. 오진이었다. 지극히 정상이었다. 뇌수종이라는 말을 믿고 낙태라도 했으면 어쩔 뻔 했겠는가.

세상에 태어나서 어느 한 사람을 그토록 미워한 적이 없었다.

그 아이와 함께 졸업 연주를 했다. ‘두 사람’의 손 끝에서 나오는 소리가 그렇게 깊고 아름다울 수 없었다. 임신 8개월 때였다. 아이는 완벽을 향해 달리는 그의 ‘고약한 성격’까지 바꾸게 했다. 한때였을 수도 있지만 여유의 멋과 맛을 조금은 알게 되었다.

그래 가자. 한국 땅에서 여성지휘자의 씨를 뿌리자

그 아이는 엄마 손이 엄청나게 필요 할 때였다. 남편도 지친다고 했다. 돌아가서 편견의 벽으로 둘러 쌓인 한국에서 여성 지휘자의 길을 개척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대학에서도, 그를 가르친 교수들도 말렸다. 좀 더 경험을 익히면 자연스럽게 실력을 인정받고 유명해 질 터이니 그 다음에 돌아가라고 했다. 충분히 할 수 있다고 했고 그럴 것 같았지만 귀국했다.

가족은 더없이 귀중한 가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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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오랜만의 가족 상봉. 메마른 가슴에 가족의 정은 채웠으나 무대는 너무 멀리 있었다.

10여년만에 돌아온 서울은 외계인의 도시처럼 낯설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지휘자라고 하면 약속이나 한 듯 되묻곤 했다.

‘전공은 하신건가, 어떻게 지휘자가 될 생각을 했는가, 한국은 아직 환경이 여물지 않아서... 여자라서 더욱 힘들지, .차라리 피아노라면 그나마 괜찮을텐데...’

하나같이 부정적이었다. 여자들이 더 묘하게 쳐다봤다. 그렇다고 투사처럼 싸울 수도 없었다. 배운 것을 다시 익히면서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달리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행히 귀국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첫 무대에 섰다. 설레임의 포디움, 스메타나의 교향시 ‘나의 조국’ 중 ‘몰다우’가 서서히 흐름을 멈추자 박수가 거센 물결처럼 밀려들었다. 2008년 8월 쯤 이었고 서른 세 살 즈음이었다.

낭중지추, 주머니 속에 있어도 송곳은 뚫고 나오기 마련이었다. 서울필하모닉오케스트라와 전임지휘자 계약을 맺었다. 서울필의 안당 단장은 ‘남녀를 통 틀어도 결코 빠지지 않는 실력자’라고 추켜세웠다.

경향신문이 그런 그녀를 기사화했다. 동아일보 콩쿨 출신인데 정작 그를 가장 먼저 알아봐 준 건 경향신문이었다. ‘표정이 살아있는 음악으로 청중을 감동시킬 여성 지휘자’라고 보도했다.

“한국에서의 첫 공연이었습니다. 무대가 조금 낯설기도 했지만 알게 모르게 긴장했던 것 같았어요. 완벽하게 준비했지만 미흡하다고 생각했는데 관객들은 좋게 봐주었습니다. 청중들이 지휘자, 오케스트라와 교감하면서 편안하게 들을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야 한다고 다짐했습니다.”

‘늘 미흡한 무대’, 김봉미는 그래서 매번 자신과 치열하게 싸운다

그는 1인 3역, 4역을 한다. 기획을 하고 곡을 준비하고 마음에 들 때까지 연습하고 또 연습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머릿속에 다 넣고 포디엠에 오른다. 그리고 틈틈이 곡 해설을 곁들이는 ‘친절한 지휘자’가 된다. 더러는 지휘자와 관계없는 잔일까지 한다. 그 모든 게 오롯이 지휘자의 몫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완벽함을 향한 끝없는 도전. 스스로를 괴롭히며 조금 더, 조금 더를 외치며 채찍질 했다.

그런데 사실 완벽함이란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조금 모자라는 것이 완벽한 것인지도 모른다.

청중들, 스탭들이 대단했다고 해도 그는 만족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스스로 부족한 걸 찾아내기 때문이다. 다음을 위해서라지만 벼랑 끝에 서기 위한 핑계였다. 그래야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믿고 ‘늘 처음처럼’ 무대에 오를 수 있어서다.

덕분에 그의 공연장을 찾는 관객들은 김봉미를 최고의 지휘자로 친다. 눈으로 보았으니 멋진 여성인 걸 알지만 여성으로 보지 않는다. ‘여성 지휘자가 아니라 실력파 지휘자로 기억되고 싶다’는 그의 작은 바램이 이루어 졌다.

악보는 있어도 악보 없이 지휘하는 지휘자. 시나리오를 철저히 준비하고도 무대에선 거들 떠 보지도 않는 음악 감독. 김봉미의 끝없는 길이 어디까지 이어질지는 그 자신도 모른다.

‘왜 지휘자냐거든...그냥 하지요’

아버지는 부산시향 지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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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범과 열정의 순수파 음악인이었다. 만인에게 다정했지만 단 한 사람, 딸에겐 더없이 엄격했다. 숱한 날들을 아버지 때문에 울었다. 한참 후에야 그것이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딸은 이를테면 ‘만만의 대상’이었다. 반주자고 대타 지휘자였지만 아버지의 성화를 온통 받아들여야 하는 ‘화 받이’였다. ‘왜 나만 가지고 그럴까’했지만 ‘사랑하고 키워야 하는 딸’이기에 더욱 엄하게 했다.

딸이 어느 날 문득 지휘봉을 잡은 건 우연이 아니었다. 어떤 자극을 받아서도 아니었다. 지휘봉을 잡은 아버지가 늘 함께 있었다. 어깨 넘어 배운 것 같지만 딱히 그렇지도 않다. 아버지가 늦는 날이면 대타 지휘자가 되었다. 열정의 화신인 아버지가 정말로 늦는 일은 없었다. 아버지는 그렇게 그에게 기회를 넘겨 주었다. 그는 백 번 가르치는 것 보다 직접 한 번 해보는 게 훨씬 효과적임을 알고 있었다.

딸은 또 그렇게 늦는 경우를 대비했다. 아버지의 지휘 모습 뿐 아니었다. 단원들을 어떻게 긴장시키고 어떻게 릴렉스하게 풀어주고 어떻게 하나로 만들어 웅장하면서도 부드러운 소리를 뿜어내게 하는 지를 눈여겨 보았다.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터득했다.

지휘는 그러니까 오래 전 이미 정해진 숙명이었다. 그저 모르고 있었을 뿐 조금씩 조금씩 스며들어 몸과 마음과 머리 속에 꽉 차 있었다.

“왜 지휘를 하게 되었느냐고들 묻습니다. 천재 피아니스트의 길이 아깝지 않았느냐고도 합니다. 처음엔 그럴 때 마다 답이 궁했죠. 나도 그 이유를 몰랐으니까요. 하지만 이내 알게 되었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냥 한 거였죠. 지휘 본능이 세월과 함께 자라다 성숙해지자 불쑥 내 삶에 뛰어 든 것 이었습니다. 피아노와 바이올린의 세월도 따지고 보니 지휘를 위한 기초 단계였습니다. 악기의 세계를 알고 연주자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어야 모두를 하나로, 하나를 모두로 바꿀 수 있습니다. 100이 1이고 1이 100인 겁니다. 저마다의 악기가 제 빛을 내야 전체의 멋들어진 하모니가 탄생합니다. 지휘자가 할 일이죠”

‘그냥’처럼 강력한 것도 없다. 그냥은 그냥이기 때문이다. 논리나 명분이 필요치 않다. 마음 가는 대로이고 몸이 움직이는 대로이다.

그는 이름마저 운명이라고 우긴다. 김봉미의 봉이 지휘봉의 봉자라고 했다. 그 뜻이 아님을 그도 알고 우리도 알지만 지휘자 아버지가 굳이 그렇게 촌스런 이름을 지은 걸 보면 마냥 아니라고 하기도 좀 그렇긴 하다. 여자인데다 이름마저 카리스마 넘치는 지휘자하고 너무 맞지 않아 만나는 많은 사람들이 예명을 추천했지만 들은 체도 하지 않은 이유다.

그런데 넓게 생각하면 나쁘지 않다. 한국적인 관점에선 촌뜨기 같지만 글로벌로 보면 제법 괜찮다. 영어, 중국어, 일어 등 전 세계 어느 언어든 이응자 발음은 다 할 수 있다. 봉은 발음을 해보면 매우 음악적이다. 부르기 편하고 음률이 통하니 세계적인 지휘자의 이름으로 손색없다.

타고나고 길러 진 매력적인 지휘자 김봉미는 어떤 지휘자일까.

일단 카리스마가 넘친다. 무대에 오르면 오케스트라 뿐 아니라 청중들마저 압도한다. 억지가 아니다. 매우 자연스럽다. 실력이 그의 변함없는 카리스마 원천이다.

강함을 능히 잠재우는 부드러움, 깊고 다양한 빛깔의 살아있는 소리가 그녀를 여성지휘자가 아닌 카리스마 넘치는 지휘자로 만들었다. 그건 음악에 대한 깊이와 사람이 있고 관객에 대한 따뜻한 배려가 있어서 가능했다.

도랑인 줄 알고 첨벙 뛰어들었는데...

자갈돌이 깔린 맑고 작은 도랑. 음악의 세계가 그런 줄 알았다. 그래서 겁 없이 첨벙 발을 담궜다. 하지만 그 세계는 들어가면 갈수록 끝을 알 수 없는 커다란 강물이고 바다였다.

더러 두려움을 느끼지만 그 때문에 물러서진 않는다. 그럴수록 더욱 기를 쓰고 오른다. 그래서 그의 일이 ‘시지프스의 돌 굴리기’다. 매순간 올인해서 지쳐 쓰러지기도 하지만 언제 그랬느냐는 듯 툭툭 털고 일어선다.

더 깊은 소리, 더 다양한 소리, 청중과 하나 되는 소리, 웅장함 속에서 감미롭게 다가오는 소리, 진심이 느껴지는 소리, 들으면서 보는 소리, 새로운 소리가 다 그렇게 그의 것이 되었다.

언제쯤 그는 멈춰 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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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이 없죠. 알면 알수록 더 오묘해서 만족이 없습니다. 지휘봉을 내려놓는 마지막 날까지 그럴 것 같아요”

아직도 한참 멀었다는 김봉미 지휘자.

그러나 그는 이미 정상에 서있다.

모두가 알지만 그걸 그만 모르고 있다.

그렇다해도 그의 ‘시지프스 돌 굴리기’는 끝날 것 같지 않다. 선택이지만 천형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녀는 늘 새로운 길에 서 있다.

김봉미 프로필

* 독일 Detmold Musik Hochschule(데트몰트 국립음대) 오케스트라 지휘(Kapellmeister Diplom)졸업

* 독일 Essen Folkwang Hochschule(에센 국립음대) 수석입학 및 졸업

* 러시아 St.Petersburg concervatory(페터스부르크 국립음대) 수료

* 2010 헝가리 부다페스트 국제 마에스트로 콩쿨 여성최초 수상

* 2012년 대한민국 오페라 대상 지휘자상 수상

* 2011년 차세대를 이끌어갈 리더 선정(국제신문)

* 2011년, 2012년 대한민국 오페라 페스티벌 지휘

* 제1회 신진 여성 문화인상 수상(문화관광부)

* 2012년 한중수교 20주년 기념 창작 오페라 초연 베이징 초청 공연

* 2015년 말레이시아 국왕 초청 한&말 교류 오페라 갈라 콘서트 공연

* 2017년 호치민 세계 경주 엑스포 초청공연 지휘, 호치민 메세나 창립공연 지휘

* Südwestfalen Philharmonie Orchester 독일3개 도시 순회연주

* Bielefelder Theater Orchester, Dresdner youth Orchester, Duna symphony orchester, Detmold chor, Buende chor, Stuttgart Bach Akademie Orchester &Chor, Detmold Big Band Orchetrer, KBS교향악단, 대전시향, 부산시향, 창원시향, 서울필하모닉, 시흥 교향악단외

* 서울필하모닉, 시흥교향악단, 헤럴드필하모닉 상임지휘자 역임

* 부산시립청소년교향악단 수석지휘자 역임

* 한국예술종합학교, 부산대학, 단국대 초빙교수 역임

* 현) 베하 필하모닉 예술 총 감독 겸 상임 지휘자, 유나이티드 필하모닉 음악감독, 세계 4대 오페라 페스티벌 음악 총감독

[이신재 마니아타임즈 기자/20manc@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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